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어 전쟁 (문단 편집) == 개요 == >보어 전쟁만큼이나 영국의 전쟁사상 승자에게나 패자에게나 참혹한 결과만 가져다 준 전쟁도 없다. 영국은 전장에서 일시적으로 겪은 전술적 패배는 극복했지만, 영국 제국주의가 입은 도덕성과 이데올로기적 위상에 대한 타격은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역사상 전례없는 강도로 유럽의 계몽된 지식인 사회 전반에게 비난받은 이 전쟁은 심지어 40년뒤 [[나치스]]가 그 끔찍한 시설을 세우고 '강제수용소 (concentration camp/konzentrationslager)'라고 불렀을 때 어떤 역사적 선례에게 뒤틀린 존경심을 표하고 있는지 유럽인들은 똑똑히 알았을만큼 후세의 기억에 영국의 만행을 각인시켰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그 시대 반전 진영이 그랬던거처럼 보어인들 또한 일방적으로 좋게봐줄순 없다. 보어인들은 민족독립이란 고귀한 이상을 위해 싸웠지만, 이 뿐만 아니라 타인종에 대한 배제, 황금에 대한 탐욕, 원주민에 대한 박해란 추악한 면 또한 그대로 유지하며, 오히려 강화되었다... > >결국 반백년 세월이 흘러 현대에 와선 이 전쟁은 당사자들 모두에게 처참한 유산만 남겼다. 당시 영국령 케이프 식민지 총독이었던 밀너경은 본인이 원했던 전쟁은 얻었지만 그의 비전과 계획은 모두 실패했고, 보어인들은 독립을 잃었지만 반대급부로 문명과 진보를 얻지는 못하였으며, 야만적인 방법으로 남아프리카의 주인이 된 영국인들은 조만간 다시 쫒겨나거나, 보어인들에게 뜨내기 이방인(uitlander) 취급이나 받게 될 예정이다. 그리고 그 당시 서로 죽일듯이 전쟁하던 [[프리토리아]]의 가장 속좁고 인종차별적인 보어인 지주들과 [[요하네스버그]]의 가장 탐욕스런 영국계 광산 회사들은 이제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사이좋게 손잡고 남아프리카 땅의 절대 다수인 흑인 원주민들을 핍박하며, 다른 사람도 아닌 얀 스뮈츠가[* 제2차 보어 전쟁 당시 보어측 장성으로 이후 1, 2차세계대전때 영국령 남아공 식민지군을 이끌었다. 1950년 사망] [[국민당(남아프리카 공화국)|현 정권에게]] '[[파시스트]]스런 [[아파르트헤이트|방법으로]] 권력을 잡으려 하고 있다'라고 비난하고 있는 판국이다. 이 전쟁을 일으켰던 밀너나 보어인들을 믿고 자치권을 수여한 캠벨배너멘이[* 1905-08년 재임 영국 총리. 보어 전쟁 전후로 남아프리카 식민지 정책과 남아공 자치령 성립에 기반이 되는 법들을 만들었다.] 무덤에서 이 꼴을 봤으면 도대체 뭐라고 할까? >----- >영국의 역사학자 AJP Taylor, BBC 맨체스터 보어 전쟁 50주년 특집 기고 에세이 * [[영어]]: Boer Wars / Anglo-Boer Wars (영국-보어 전쟁) * [[아프리칸스어]]: Vryheidsoorlog (자유 전쟁)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북부 지역에서 발생한 [[전쟁]]들로 제1차 보어 전쟁([[1880년]]~[[1881년]])과 제2차 보어 전쟁([[1899년]]~[[1902년]])로 나뉜다. 당시 남아프리카의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흑인]]이었지만, 이 전쟁은 주로 백인이었던 [[보어인]]들과 [[영국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영국계 백인]]들의 싸움이었다. 영국군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였고 전 세계에서 현지 원주민들을 상대로 [[기관총]]으로 무쌍을 찍고 있었지만 보어인들도 같은 백인이라 [[맥심 기관총]] 같은 당대의 첨단 무기로 무장해 싸웠고 근대적 전술, 기마술에 능숙하고 남아프리카의 거친 자연에서 수렵이 일상이던 사람들이라 영국군이 매우 고전했다. 이들 외에 남아프리카에 살던 대부분의 흑인들은 보어인들의 억압에 대응하여[* 보어인들은 대부분 [[백인우월주의]]자들이었고, 영국계 백인들도 물론 백인이라 흑인을 아래로 보는 사상은 있었지만 보어인에 비하면 비교적 덜했다.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의 식민지를 빼앗음으로써 현지 아프리카인들과 어느 정도 원만하게 지낼 수 있었던 영국과 달리 남아프리카 현지에서 대대로 살던 보어인들은 새로운 땅을 개척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흑인 원주민들과 싸워야 했다. 보어인들도 나중에 폐지하였지만, 처음에 영국 땅을 떠나 새로 개척하려던 것도 [[노예제]]의 폐지에 대한 반발심도 컸다.] 영국을 지지했지만 그들은 전쟁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고, 양쪽 다 공식적으로 흑인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군인이나 독자적인 집단으로서는 큰 활약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양쪽 다 대부분의 노동자 및 비전투 요원들은 흑인들이었고, 결국 2차 전쟁 말기에는 영국 측에서 대략 1만명의 흑인들을 무장한 군인으로서 운용한 것을 인정하게 된다. 다만 이는 영국의 초토화 및 [[수용소|강제수용소]] 정책으로 인해 지역이 막장화되자 먹고 살기 위해 군대에 지원할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 인종갈등으로 크게 흑인과 백인의 갈등인 흑백갈등, 흑인들의 민족별 갈등인 흑흑갈등, 백인들의 민족별 갈등인 백백갈등이 있는데, 이 셋 중 백백갈등에 해당하는 게 바로 보어 전쟁으로 인한 보어인과 영국계 백인의 갈등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